오랜만에 받은 책 추천에 설레는 마음으로 책을 사 읽는다. 내가 생각나는 책이라는 말을 듣고 참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과학 전문 기자였던 저자는 상실에 오래도록 몸부림친 사람이었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그녀는 열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필시적으로 엿본다. 작 중 등장하는 분류학자, 데이비드는 그녀에게 있어 스스로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끊임없이 오만을 삼키며 나아가는 사람으로 비추어진다.
애석하게도, 데이비드의 분류에 대한 열정은 끝내 우수한 형질의 인간이 있음을 인정하고, 종 전체의 개량을 위해 우수 개체들을 선별 및 개량해야 한다는 이념, 우생학으로 전락한다. 아리아인이 최고야! 를 외친 독일의 어느 독재자처럼 말이다.
분류학이란 각 생명체들 사이에 선을 긋고, 인덱스를 붙이는 것이다. 평생도록 선을 그어온 데이비드도 어렴풋 경계의 모호함을 인식했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찾은 삶의 의미를 끝내 관철시킨다. 데이비드가 그은 선들은 종 간의 경계를 만들고, 동종과 타종의 개념을 만들고, 위계를 만든다. 만생이 서로 아주 별개라면, 결국 어떤 생명은 원래부터 작고 연약하며, 어떤 생명은 본디 강하고, 똑똑하다는 뜻이리라.
다윈의 진화론이 대두된 이래로, 이제는 종 간의 경계는 실선이 아니라 스펙트럼인 것을 안다. 우리는 편의를 위해 침팬지와 인간 종을 구분하지만, 그 사이 경계는 사실 모호하다. 지금이야 퍽 다르지만, 거슬러 올라가 고대의 어류들은 오히려 포유류의 정의에 더 합치한다. 우리는 이 모호함을 모두 어류라는 경계에 구겨 넣는다.
물고기도, 표유류도, 모든 생명체와 무기질도 엄밀하지 않다. 그저 국경선처럼 대지에 임의로 그어 놓은 '편리한' 선일뿐이다. 그래서 저자는 말한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책에서 반야심경과 비슷한 향이 났다. 세상 만물은 연기하며, 즉 그물처럼 이어져 있으며 경계가 없다는 것. 어떤 것의 성질은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는 부처의 법과도 유사한 맛이 있다. 그렇다면 분류학은 정말 의미가 없을까? 끝내 위험한 사상으로 점철되어 버렸지만, 데이비드의 선 긋기는 어떤 진리도 담지 못한 걸까?
여기서부터는 사견이다.
나는 생각했다. 결국 절대적 진리는 없다. 적어도 영원한 진리는 없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저 믿으며 살아간다.
그러나 여전히, 살기 위해서 무언가를 믿어야 한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의미 없는 세상에 의미를 가하기 위해 믿음은 필요하다.
의미 없는 삶을 차마 견디지 못하는 게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언제든 믿음을 몰락시킬 준비를 해 놓자.
네임드 스님이신 성철 법사의 인용으로 유명해진 현어 구절을 가져와 봤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그러나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즉 산은 물, 물은 산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산은 그저 산이고, 물은 그저 물이어도 될 것이다. (다소 의역)
수미상관, 정확히는 수미상동처럼 들리지만, 맨 처음의 산 즉 산과 마지막의 산 즉 산은 매우 다르다.
산을 산으로 명백하게 받아들이는 것과 산이 산이 아님을 알고 산으로 임시 명명하는 것은 천지 차이다.
산이 산이 아니게 되고 물이 물이 아니게 되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린 방향을 찾기 위해, 대화를 위해, 사회를 돌아가게 하기 위해 산은 산이라, 물은 물이라 명명하고, 어디까지가 산인지 믿는다.
실속은 취하되, 매몰되지 말야야 한다.
인간은 줄곧 틀려왔다. 범주를 의심하고 그 밖의 세상을 상상하자.
모든 것이 의미 없다는 말은 곧 모든 것이 의미 있다는 뜻이 아닐까.
일체는 유심조니, 어떤 일체를 심조할 것인지를 면밀히 따져보고, 자주자주 고쳐 나가자.
점오점수라, 꾸준히 깨닫고 꾸준히 수양해야 할 것이다.
책 추천에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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