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찬을 받았다. 나는 무척 좋았지만, 겸손했다. 도덕적 정당성은 강력한 호소력과 명분을 지니니까, 여기서의 겸양은 나를 도덕으로 도금시켜 줄 절호의 기회라고 여겼던 거 같다.
한참을 겸손하다 보니 칭찬의 발원지가 나한테 묻는다. 왜 온전히 즐기지 못하냐고. 무의식적으로 그게 선한 거라서, 선한 건 도덕적인거라서, 라고 말하려다 문득 멈칫한다.
도덕은 뭘까. 도덕은 선함을 정의하는 규칙이자 관념이고, 사회적 합의다.
그런데 니체에 따르면, 현재의 도덕은 노예의 도덕이라고 한다. 노예였던 유대인들이 지녔던, 아니 지닐 수 밖에 없었던 순종, 겸양, 희생, 절제라는 특성을 기독교와 버무려 '선'으로 탈바꿈 시킨 것, 그것이 노예의 도덕이다. 이렇게 가치 전도된 도덕들은 지금까지도 선으로 여겨진다.
이 특성들의 반대는 그럼 악이다. 반항, 과시, 이기, 과욕이 그 예다. 우리는 반항하고, 과시적이고, 이기적이며, 욕심부리는 사람을 악인으로 칭한다.
하지만 사실 이 단어들은, 다른 말로는 자주, 자신, 자애, 열정이다. 이것이 주인의 도덕이다.
이에 니체는 말한다. 신은 죽었다고. 노예였던 유대인들이, 기독교를 통해 불가역적으로 만든 가짜 도덕에서 해방되어,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주인의 도덕을 회복하자고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그럼 과연 주인의 도덕이 진짜 선인가? 과시, 이기, 반항, 과욕이? 난 딱히 그렇지도 않아 보인다. 니체가 활동 할 당시는 기독교적 가치가 당연함으로 간주되던 시기였고, 니체는 이에 맹목적으로 순종하기만 하던 대중들을 비판했다. 그러니까, 암흑시대의 사람이였기 때문에 주인의 도덕을 강조한 걸지도 모른다는 거다. 그땐 누구도 주인의 도덕을 선으로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그럼 지금은 어떨까, 양극화를 넘어선 N극화의 시대에서 기독교적 규범은 절대적인 힘을 잃어 간다. 우리는 주인과 노예의 도덕이 버무려진 N극화된 도덕관 속에서 허우적대며 진리를 찾는다. 무엇이 선인가, 무엇이 악인가. 위키드의 마녀는 선인가, 진격의 거인의 에렌은 악인가.
이윽고 선악은 모호해지고, 경계는 불분명해졌으며, 결국 상대적이라는 걸 인식하게 된다.
역시나, 선악조차 고작 믿음이였다.
선악도 믿음이라면, 다시 믿음의 타당성은 오직 기능에서 온다.
왜 우리는 보편적 선을 추구해야 하는가? 그것은 기능적으로 보편적 선을 추구하는 게 자신을 포함한 대다수의 사회 구성원에게 보편적으로 이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 도덕의 기능적 이점을 논리적으로 다 설명하고 하나하나 납득시키기엔 너무 비효율적이니까, 이러한 것이 선해! 라는 믿음을 만들어 주입하는 거다. 믿음은 가성비 미친 행동 유도 수단이니까.
믿음에게 잠식당하면, 그 믿음에 위배되는 상황에 처했을 때 불쾌감과 찝찝한 기분을 느낀다. 이 주입된 불쾌함은 생각을 유도하며, 유도된 생각은 특정 행동을 야기한다. 야기된 행동들은 사회에 주로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 나에게 주로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사회는 이렇게 돌아간다. 도덕이라는 믿음의 기능이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의 도덕을 맹목하지 말아야한다. 정확히는, 현 도덕을 옳은 것이라 보지 말고 좋은 것이라 보자. 옳음은 오직 상대적으로만 정의되기에, 우리는 현 도덕을 좋아해야 한다. 좋아한다는 건, 그것이 실제로 나에게 이점을 주면 좋아할 수 있다. 즉, 기능적으로 이득이 된다는 걸 유념하자는 거다.
도덕에 대해선 옳고 틀림 보단 좋고 싫음으로 갈음하자. 그러면, 놀랍게도, 지금까지 사람들이 차곡차곡 쌓아온 현재의 도덕이, 얼마나 좋은 것들의 집합인지를 깨닫게 된다.
이를 깨닫고 따르자. 깨닫지 않고 그저 따르는 도덕은, 순종, 무엇이든 결국 노예의 도덕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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