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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기록부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by Amins 2021. 7. 16.

좋아하는 유튜버가 있다. 희렌 최라는. 방송국 라디오 pd 출신으로 유튜브에서 사람들에게 소통에 대한 강의를 올리는 사람이다. 라디오 dj 일도 잠시 해서 그런지, 목소리와 말에 기품이 깃들어 있다. 사람을 매료시키는 목소리와 더불어 깊이 있는 내용을 담은 영상들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저 사람처럼 우아하고 깊게 말하고, 사람들을 대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든다. 어느 날 그는 하나의 영상을 올렸다.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에 대한 영상이었다. 김연수 작가라고, 꽤 유명하다고 하지만 문학에 문외한인 나로선 처음 들어보는 사람이었다. 궁금해졌다. 내가 동경하는 사람이 동경하는 사람이라니, 아득히 멀고 높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하늘 위의 하늘을 맞이한 나는 홀린 듯 그의 대표작을 빌렸다.

 

이 책과는 그렇게 만났다.

 

 

수필이었다. 작가가 살면서 겪은 경험에서 스며 나온 통찰을 담담한 어투로 풀어낸 책은 뭐랄까, 밍밍한 맛이었다. 자극적인 콘텐츠가 범람하는 시대에 사는 현대인으로서, 집중해서 읽기가 쉽지는 않았다. 어려운 말도, 개념도 없었는데 한 번에 이해가 되질 않는 까닭은 아직 작가만큼의 통찰을 스스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해랑은 별개로, 어떤 구절에서 오랫동안 사로잡혀 있었는데, 124쪽의 다음 문장이다. 그 공허감이란 결국 새로 맞닥뜨려야만 하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도피해 들어가는 자폐의 세계였던 것이다.’ 작가는 이 장에서, 자기가 느낀 공허감, 무력감, 외로움을 마치 도피처 인양 말한다. 공허감은 부정적이고 고통스러움에 해당하는 감정인데, 그게 어떻게 도피처가 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한참을 바라보았다.

 

 

올해 전과를 했다. 기존 학과와의 연관성이 전혀 없는 아주 생소한 학과로 전과한 나는 이례적으로 고통스러운 한 학기를 보냈다. 힘들었다. 괜히 왔나, 하는 후회와 벌써 지치는 건 말도 안 되지 암, 하는 자기부정을 뒤섞으며 꾸역꾸역 공부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우울해졌다. 하늘을 뚫을 듯 높았던 자존감은 바닥을 기고 있고, 거울을 보면 죽은 생선 같은 눈을 한 모르는 남자가 서 있었다. 정신이 이상해진 것 같았다. 두려웠다. 이러다간 정말 우울증이든, 분열증이든 뭐가 됐든 하나는 걸릴 것 같았다. 그때부터 공부는 물론이고 대인관계까지 손을 놓게 되었다. 어떤 것도 받아들이기 싫었고, 누구도 만나기가 싫었다.

 

그런데 모순적이게도, 고통스러웠지만 편해졌다.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로 머리를 짜 맬 필요도, 스트레스받는 사람과 이야기할 필요도 없게 되자 아늑함을 느꼈다. 그 아늑함은 물론 고통이 수반된 이상한 아늑함이었지만, 그래도 이걸 이유로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게 된 게 좋았던 것 같다. 정말 이상하게도, 고통을 통해서 나는 더 큰 고통을 외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아니 하지 못하는 이유를 만들어버린 나는 죄책감 없이 일을 손에서 놓을 수 있게 되었다. 힘들고 우울하다는 미명 하에.

 

 

작가가 말한 자폐의 세계는 이런 것이 아닐까. 새로 맞닥뜨려야만 하는 세계가 무서워서 숨는 자폐의 세계는 결국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기 위한 자기 합리화일 뿐이었다. 나에겐 우울이, 작가에겐 공허가 그 합리화의 수단이었던 거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쳤을 때, 나는 다시 열의를 되찾았다. 정확하게는, 나를 붙잡고 있다고 생각했던 이 감정이 허상이라는 걸 깨달았다. 저 문장 덕분에 나는 멈춰야 할 이유를 잃었고, 다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책이 가진 통찰의 바운더리가 정말 넓다. 문학 불모지인 뇌를 가진 나조차도 잠시 멈칫하게 만든 책이라면,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더 많은 문장에서 멈칫할 수 있을 것이라 자부한다. 동경하는 사람의 추천으로 읽은 책은, 동경하는 사람을 한 명 더 만들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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